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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수전 겪어보니 인생은 개그가 아니네요”
정치적 오해 사는 발언으로 방송계 떠난 뒤로 모진 시련 겪어… <명심보감>을 해석하고 강의하는 ‘전 국민의 훈장님’으로 재기해 존경받는 삶
“아니, 저 사람 배추머리 김병조 맞아? 사람이 많이 달라졌네.” “그러게요. 요즘 잘 살고 있나 봐. 마치 인품 좋은 학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 최근 TV 채널을 돌리다 언뜻 지나치면서 본 그를 놓고 우리 식구들이 무심코 던진 대화내용이다. 오래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가 별안간 왜 나온 거지? 다시 채널을 돌려 그 프로그램에 고정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한학자로 180도 변신한 것이다. 얼굴 표정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임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1980년대, 한 시대를 웃기고 울렸던 ‘최고의 개그맨’이 무슨 연고로 한학자가 돼 나타났단 말인가? 도대체 잘 들어맞지 않는 조합인 것 같았다. 게다가 지난해 말 동양 인문학의 진수인 ‘청주판 명심보감’을 직접 해석하고 풀어 쓴 <김병조의 마음공부> 상·하권(평역)까지 출판했다니 단순히 호기심의 수준을 넘어선 듯했다. 그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묵직한 그의 책을 들여다보자니 그의 공부가 보통사람이 상상하는 정도를 벗어나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이 한눈에 읽혀졌다. 진정한 한학자로 거듭났다는 얘기다. “상대를 사랑하는데도 친밀해지지 않거든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고(愛人不親 反其仁), 많은 이를 다스리는데도 잘 다스려지지 않거든 본인의 지혜에 문제가 있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고(治人不治 反其智), 상대를 예로 모셨는데도 응답이 없거든 상대를 공경함에 부족함이 없었는지 돌아보라(禮人不答 反其敬)’고 얘기합니다. 이 얼마나 주옥같은 얘기입니까. 명심보감의 진가가 들어나는 대목 아닌가요?” '배추머리 개그맨’이 ‘한 학자로'
“왜 하필 명심보감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가 거침없이 전한 첫마디였다. 그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펜을 들어 방금했던 말을 문장으로 일필휘지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쭉쭉 써 내려간 필체가 막힘이 없고 유려해 멋진 서예작품 하나가 뚝딱하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몇 년 전부터 누군가에게 새롭게 배워서, 달달 외워서 전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체내에 명심보감이 완전히 녹아 든 상태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지난달 말, 서울 월계동의 한 아파트 자택에서 만난 그는 30년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배추머리 김병조’가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변해 있었다. 올해 나이 66세. 38세에 개그계를 떠났으니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 속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사람들의 인기를 누리던 그 시절보다 15㎏이 빠진 몸은 가벼워 보였고 살이 빠진 얼굴은 결연하고 단아해 보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훈장’의 풍모를 돋보이게 했다. 머릿속에 남아있던 과거의 ‘배추머리’에 대한 강렬한 추억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흘러간 시간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지금 광주광역시에 있는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초빙교수이자 이 대학 평생교육원 교수로 일주일에 하루씩 강의를 한다. 성인교육기관인 평생교육원 학생들은 전직 교장, 교수, 박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가 대부분이어서 뒤늦게 명심보감을 공부하겠다는 학생들의 열정이 그를 긴장시킨다. 한 예로 모 지역 문화원장을 하고 있는 어떤 분은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청주에서 버스를 세 번씩 갈아타고 학교에 오는데 1년 동안 결석 한 번 하지 않은 ‘김병조 열혈 팬’이다. 또 어떤 중년 학생은 10년째 그의 강의를 반복해 듣고 있을 정도란다. 그가 명심보감과 연을 맺은 것은 어린 시절 부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평생을 한학자로 살면서 전남 장성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던 아버지(길재공·吉齋公)의 엄한 가르침이 밑받침이 됐다. 명심보감은 중국 명나라 때 절강성 항주 출신의 범립본이란 학자가 동양에서 회자됐던 주옥같은 격언들을 취합해 집대성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단종임금 때 몇몇 학자가 뜻을 모아 청주에서 이를 출간했으나 그들이 파직되면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그 가르침 속에는,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의 입장에서 보면 듣기 거북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흐른 1974년 벽사 이우성 박사가 경상북도의 한 오래된 가옥에서 이 청주판 명심보감을 찾아내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들에게는 유익한 인생지침서 정도로 알려진 명심보감은 오늘날은 여러 종류의 축약본이 나와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명심보감은 원래 효행편, 자녀교육편, 부녀자의 덕목편 등 19가지의 주제에 대해 동양 성현들의 고견과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다. 그는 매주 수요일은 온전히 광주에서 지낸다. 하루 종일 수업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평생교육원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명심보감 강독을, 오후에는 학부생과 교육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현대생활과 인성교육’을 주제로 강의한다. 학부생 수업에는 수강자가 넘쳐나 두 시간대로 나눠 300명씩을 가르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딱딱한 한자어 속에 감춰진 교훈적인 내용을 특유의 위트가 담긴 입담으로 풀어내니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나 있다. 명심보감 강의를 시작한 지 15년이 된 지금은 전국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 하루도 쉴 날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어떤 때는 하루에 강의가 두세 군데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일반 기업은 물론 전국 257개 지방자치단체와 각 행정부처, 경찰서, 군부대, 학교에 이르기까지 강의 일정이 빼곡하게 이어진다. 한국전력 기술원에서는 매주 화요일 1년 동안을 임직원들에게 ‘공직자의 자세’를 주제로 명심보감을 가르친 적도 있다. 정치성 발언 빌미로 방송계에서 퇴출돼
그는 최근 국회의정연수원 사무처 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는데 주최측으로부터 교육프로그램 실시 이후 “가장 감동적이고 유익한 강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며 싱글벙글했다. 연수원 관계자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면서 즐거워하는 그의 표정에서 새로운 인생에 대한 즐거움과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졌을 정도다. 그의 매니저 겸 운전기사 역할을 도맡아 하는 아내 김현숙 씨도 만족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요즘 남편이 좋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아무리 먼 곳에서 강의가 들어와도 여행삼아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으니 부부 금슬도 깊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이 다른 걱정 없이 강의에만 전념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부인 김씨는 사실 동양화가로서도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녀는 17회 한국현대미술대전 사군자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이력을 지녔다. 이번 김 교수가 출간한 책에도 그녀가 직접 그린 동양화를 삽화로 넣어 책의 품위와 멋스러움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야말로 유쾌한 내조가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출간한 책과 강의에 대해 소감을 말하는 동안 그녀의 손은 연신 남편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한때의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한학자로서 새 인생을 개척한 남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한때 인기 정상가도를 달렸던 개그맨에게 오랫동안 시련을 안겨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김 교수가 당시만 해도 시청률 60%를 자랑하며 인기 정상가도를 달리던 MBC의 <일요일밤의 대행진>을 진행하던 1987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민정당의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던 와중에 그가 발언한 개그 한 토막이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전당대회 뒤풀이 행사로 마련된 오락프로에서 정당 측이 써준 각본에 있던 것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 화근이 됐다. ‘민정당은 정을 주는 당이고, 통민당(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은 고통을 주는 당’이라는 문구였다. 무심코 내뱉은 이 말이 다음날 신문에 기사화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하루 저녁 오락 행사에서 한 말이니만큼 당연히 휘발돼 사라질 것으로만 여겼죠. 그런데 애꿎게 다음날 신문에 1단짜리 기사가 문제가 됐어요.” 이날 행사에 참석한 한 신문사의 정치부 기자가 그의 발언을 가십기사로 쓴 것을 야당이 문제삼고 나온 것이다. 대학·기업·관공서 등 전국이 강의 무대
당시 잘나가는 최고 개그맨으로서 공인 입장에서 보면 무책임한 발언 아니었을까? 그가 대답했다. “아니죠. 저도 고민했습니다. 안 하겠다는 얘기도 했고요. 그쪽에서는 ‘알아서 하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잘나가던 그리고 앞길이 창창한 38세 방송인이었던 제가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그냥 그 위치를 누리고 싶어 민정당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거죠. 그런 발언은 전당대회 오락프로에서 한 것인 만큼 그 자리에서 웃고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죠. 가수들도 나와 노래하는 여흥프로였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발언은 신문기사로 옮겨지면서 엄청난 후폭풍을 불렀다. 당장 그에게 위협적인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아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전화 때문에 온 가족이 한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을 정도다. 신중치 못했던 발언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던 것이다. <일요일밤의 대행진>을 진행하던 7년여 동안 여러 가지 악습이나 사회 지도층에 일침을 가하는 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해왔던 그에게 거꾸로 온갖 질타가 쏟아진 것이다. ‘지구를 떠나거라’,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그의 유행어는 부메랑이 되어 그에게 돌아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됐다. 그 일은 그 후로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다. 평생 술, 담배를 안 하고 유흥업소 출입도 안 하며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그였는데 세상의 비난에 시달리다 보니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혈압이 높아져 안구의 혈관이 터지는 바람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사고가 생긴 이듬해에는 아들 문제로 노심초사했던 아버지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손인 김병조가 곤경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칫 목숨을 버릴까 전전긍긍하시다 결국 병마에 무릎을 꿇게 된 것”이라고 김 교수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개그맨 김병조는 그 후로 어린이프로그램인 <뽀뽀뽀>나 시트콤에 다시 출연하기도 했지만 예전처럼 신명이 나지 않았다. 마침 새로 개국한 SBS방송국의 개그프로(코미디 전망대)에 출연해 다시 인기를 끄는 듯했으나 그는 자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방송을 떠나게 됐다. “저를 일으켜 세운 건 어머니의 말씀입니다. 어머니는 명심보감의 격언으로 저를 위로하며 꿋꿋하게 다시 설 것을 주문하셨지요.” 그의 어머니는 늘‘含血噴人 先汚其口(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그 입이 더럽다)’, ‘善因善果(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얻는다)’, ‘道吾惡者 是吾師(나의 단점을 잘 지적해 주는 자가 나의 스승이다)’와 같은 격언을 일러주시며 거칠어진 그의 심성을 가다듬어 주셨다고 한다. 그에게 인생의 반전을 가져다준 것은 고향인 광주에 개국한 광주민방(KBC)에서 한 프로그램을 맡게 된 일이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가 했던 발언들에 주목했는지 조선대학교가 그에게 평생교육원의 강의를 제안해 온 것이다. 대학 측은 방송 내용이 유익한데다 유명인을 교수로 채용하면 홍보효과가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조선대의 제안에 그는 대뜸 명심보감을 가르쳐 보겠노라고 관계자에게 큰소리를 쳤다. 대학 관계자는 “개그맨이 무슨 성현의 말씀을 강의하시느냐”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명심보감은 효행 등 19가지 주제에 대한 성현들의 고견과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던가? 가르치는 사람의 행실이 타인의 모범이 돼야 하는데다 중국에서 들여온 책이라 원전에 한문이 가득한데 아무래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1년여에 걸쳐 학교 측을 설득했고, 틈나는 대로 명심보감의 내용을 술술 피력하면서 결국은 대학 담당자의 마음을 되돌려놓았다. 인성교육을 위해 명심보감을 교재로 선택했지만 내용은 결코 고루하지 않았다. 옛 성현의 말씀을 전하되 그 자신의 인생사에 얽힌 여러 가지 경험담과 타고난 유머를 버무려 넣으니 강의는 얼마 가지 않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개그맨이 하니 웃기나 보다. 재미삼아 들어보자”며 강의를 신청했던 수강생들은 강의가 진행될수록 그의 열정과 알찬 강의 내용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처음에는 제 강의를 가볍게 여기는 기운이 역력했죠. 그러던 것이 3회 정도 강의가 진행되자 보는 눈빛도 달라졌어요. 일부 수강생은 저를 무시했던게 부끄러운지 잘 쳐다보지 못하데요.” 그는 예전의 그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크게 웃었다. 그의 강의가 시작되고부터 해를 거듭할수록 수강생이 늘어나고 대학 밖에서도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광주시를 넘어서 전국적인 인기를 누리는 명강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도덕적 재무장’이 절실한 때, 그는 중고교생부터 팔순 어르신까지 가르치는 전‘ 국민의 훈장’ 역할을 하고 있다. 성현의 가르침 따라 ‘위기를 기회로’ 바꿔
김 교수는 “조선대 평생교육원에서 매달 강의료로 87만원을 받는데 강의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8억7천만원을 번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가 교수생활에서 얻는 성취감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는 뜻일 게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대학의 강사료로 생활이 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 수십 년 살아온 월계동의 조촐한 아파트를 보며 걱정 어린 위로도 하지만 마음은 늘 부자다. 아내 김현숙 씨의 표정도 밝다. “충분히 살만하고 저축까지 하는 걸요. 사실 인기 개그맨 시절의 수입 정도는 되거든요.” 기실 기업체가 유명강사에게 지급하는 강사료는 대학이 주는 시간당 강사료의 수십 배에 달하기 때문에 맞는 말일 게다. 최근에는 종합편성채널이 생겨나면서 그에게 출연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방송출연은 정중히 사양하는 편이다. 과거와는 달리 “사랑하는 일을 하고 살자”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아내 김씨는 “사람에 시달리는 일은 가급적 그만하자”며 남편을 설득하기도 했단다. “어떻게 즐겁고 보람 있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돈이야 부족함 없이 먹고 살만하면 되잖아요. 우리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지금은 제 인생을 바꿔놓은, 얼굴도 모르는 그 신문기자님께도 감사하면서 살아요. 하루하루가 설레고 즐거우니까요. 운전해주고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집사람도 평소 강의실에서 제 강의를 함께 들으면서 저를 돕는 일이 그렇게 행복하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삶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김 교수의 이 말에 두 사람이 마주보며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집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듯했다. 김 교수는 틈나는 대로 마라톤을 하면서 체력을 보강한다고 한다. 10㎞ 단축 마라톤을 한다.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집을 나서면서 보니 ‘遠親不如近隣(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이라고 쓴 멋진 글이 아파트 초입의 큰 돌에 새겨져 있다. 이웃한 주민들끼리 가깝게 지내자는 그의 인사이자 바람을 적은 글이다. 아파트 주민회가 그에게 요청해서 써준 글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 가족들이 서로 부를 수 있는 호(號)를 지어 선물했다. 삶의 지표로 삼자는 의미에서다. 그 자신은 응봉(鷹峰, ‘선산봉우리’란 뜻)이고 아내는 위이당(爲而堂, ‘~할 뿐’이란 뜻)이다. 미국에 유학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장녀 지현은 여원(如圓, ‘원만한 삶을 살자’), 직장인인 아들 형주에겐 대로(大路, ‘바른 길을 가다’), 며느리에게는 이위당(而爲堂,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어떤 시련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할 뿐’이라 되뇌며 산다면 ‘원만하게 바른 길을 가면서 살지 않겠는가’라는 마음가짐을 갖게 만드는 호들의 집합 아니런가. 꿋꿋이 한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삶의 자세가 그 속에 녹아 들어 있어 보고 듣는 이의 마음도 한결 경건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