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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잠시 쉬는 겁니다. 몸이 다 나으면 다시 시작할 겁니다.” 황진동씨(76·대구시 남구 대명동)는 중학교 졸업 후 2년을 쉬고 중앙상고에 진학했다. 그때 쉬는 2년간 농사일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읽은 한문이 인생 이모작의 밑거름이 됐다. 영남대 졸업 후 교사가 된 그는 청구고, 상서여상 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2002년 영남대병원 사무국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원래 교수가 꿈이었던 그는 영남대병원 재직 중 병원에 서당을 열었다. 5년간 직원을 대상으로 명심보감, 고사성어, 동몽선습 등을 강의했다. 그때 대구과학대와 가야대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고, 마침내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퇴직 후 대학에서 2년을 더 강의한 그는 이후 고3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한다. 현풍여고 강의실을 빌려 야간 강의를 했다. 이때 부인 최순금씨(73)는 황씨와 동행했는데, 현풍휴게소 정자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곤 했다. 황씨가 강의하는 동안 최씨는 뜨개질을 하거나 쑥을 뜯으며 기다렸다.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2004년 그는 향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소학부터 시작해 한자 능력 1급을 취득하고, 국가공인 예절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7년부터 그는 도포 입고 갓을 쓴 채 예절 전문 강사로 맹활약한다. 향교는 물론 초·중학교, 구청 문화회관, 유치원 등으로 신바람나게 강의하러 다녔다. 2008년에는 대명1동사무소에 한문서당을 열고 6년 동안 무료 강의 봉사를 했다. 그는 “공부하고 봉사하느라 쉴 여가가 없을 만큼 힘들었지만 참 재미있는 삶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지난해 불청객이 찾아왔다. 담낭암이 발견된 것.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항암치료를 7차례나 받았다. 지금도 매주 한 번씩은 향교에 나온다는 그는 “내 인생은 3모작이다.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봉사를 시작할 것”이라며 “예(禮)의 생활실천운동을 더욱 활발히 펼치고 도덕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생활 지도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양복을 교복처럼 입고 가방을 메고 나서는 그에게서 아직도 청년의 향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