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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 통, 쇳조각, 헌 양말 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애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윤동주(1917~1945)의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시이다. 이 시는 투루게네프(1818~1883)가 쓴 ‘거지’라는 시를 윤동주가 다시 쓴 것이다. 이 시를 암송할 때면 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관순 열사의 남동생이다.1919년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병천 현장에서 유관순 열사는 부모님을 잃었다. 오빠도 잡혀가고 본인도 옥살이 후 순국하였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다가 한 가족이 풍비박산된 것이다. 남아있는 어린 남동생 둘은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누나와 형은 감옥에 갇히고 집을 불탔는데 동네 사람들은 왜병의 눈치를 보느라, 두 어린 소년들에게 적선을 베푸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세 소년 거지의 모습에서 당시 열네 살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밥 한 끼 얻어먹기도 힘든 삶을 살다가 결국은 동네를 떠나 걸인이 되어 타지로 맴돌았고, 금강산까지 가서 탄광 일했다고 하니, 얼마나 무서운 가난 속에 있었는지 쉽게 추측할 수가 있었다.어린 동생은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고 온갖 고생을 하며 객지에서 지내다가, 해방되었다는 소리에 고향 병천으로 내려왔지만 이미 터전을 잃은 열사의 동생 유인석 할아버지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월을 살아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부모님의 피 값을 어찌 받아먹고 사느냐’며 독립유공자 유족연금을 거절하셨고, 불에 타 없어진 생가 대신에 국가에서 지어준 기와집도 천안시에 반납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어린 소년이 총탄으로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부모님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는 평생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을지 짐작도 힘들다. 윤동주 시인의 눈에 보였던 그들의 모습이 자꾸 밟힌다.백 년의 세월이 지났다. 더는 언덕에서 이런 소년 거지들을 만나지 않게 되었고 맘 편하게 측은함도 잊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로 기회를 잃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족 중 상당수가 아직도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보는 것이 아프다. 이제라도 호주머니를 뒤지어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울컥해진다.유관순 열사의 후손이 병천에서 제대로 터를 잡고 살 수 있도록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그날의 함성으로 지켜낸 이 땅에서, 이 만큼이나 사는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을 담아 유관순 열사의 유족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싶다.출처 : 충청일보(https://www.ccdailynews.com)